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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골목길 주차장 유료화 관련 건
작성자 익* 작성일 1999.10.19. 조회수 1770
================= 원본 메시지 =====================

변 종우님이 99-08-05에 작성 하였습니다.
어제도 원종동, 고강동의 시장 주변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며
답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로 입구에 프랭카드가 멋있게 걸려 있더군요.

\"8월 1일 부터 유료 주차장으로 운영 합니다.\"

그 근처에는 지역 주민의 이름으로,

\"골목길 주차장 유료화 결사 반대\"

라는 프랭카드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결들을 하시려나 궁금합니다.

시설관리 공단에 대한 사업 승인은 시의회에서 하셨을 테고,

주민 반대가 커지면, 공권력 동원 운운 하시다가...

그래도 주민 반대가 극심해 지면,
원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며
엉뚱하게 집행한 사람왔  
책임을 지라고 할까 두렵습니다.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꼭 그리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유를 가지고
주민 설득에 공을 드려야 하리라 생각 합니다.

아래 글 한번 읽어들 보세요.

그리고 시의회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
               제 목   시설관리 공단과 요시와라 비교

           일본 왕궁 아래 大手町(오데마찌)라는 곳이 있다.
           이름 그대로 일본의 큰손들이 모여 있다는 곳이다.

           지금은 증권회사 금융회사 종합상사 같은 큰손들이 있지만
           1600년대 초에는 정치적 큰손(지방 영주)의 자제가 인질로
           거주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의 이름이 아직도 그대로라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에노에서 조금 북쪽으로 요시와라 라는 지역이 있고,
           시나가와 남쪽 가와사끼 어딘가에도 요시와라 비슷한
           지역이 있다고 한다.

           요시와라(吉源).

           도대체 어떤 지역이길래 그리 유명한가?

           한마디로 지금도 휘황찬란하고, 우리 눈에는 보기만 해도
           이런 동네가 있나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의 유곽 거리이다.
           그것도 1600년대 부터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나라의 제도와 비교하면
           조선시대의 관기 제도와 비슷 하다고나 할까?
           아니 정부 관료의 수청을 들고 하는 면에서는
           비슷할 지 몰라도
           운영 방법, 목적은 다르다.

           그런데 시설관2 0단과 일본의 유곽 \'요시와라\'와는
           어떤 면에서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우선 도꾸가와 막부 탄생 시점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00년대 초,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가 죽고. 한동안의 권력다툼 끝에
           마침내 도꾸가와 이에야스란 놈이 일본 전국을 통일한다.

           그리곤 자기 본거지인 에도(지금의 동경)에 막부를 설치
           하고 쇼오군(장군)이 되어 일본을 무력 통치한다.

           이 때, 지방 영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몇가지 정책을 전개한 것이 있었다.

           첫째가 각 지방 영주의 성 주위에 설치한 해자를 메울 것.
           이는 성 방어용 연못을 없애므로 해서 무장해제 시키는
           의미가 있다.
           둘째가 지방 영주의 자제를 에도성(지금 왕궁)으로 인질로
           보낼 것.
           그 인질들이 살던 동네가 지금의 大手町(오데마찌)란다.
           세번째가 지방 영주들로 하여금 년간 1회씩은 에도성으로
           조공과 함께 문안인사 하러 올 것.

           여기에서 두번째, 세번째 정책이 요시와라 탄생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성한 지방 영주의 자제왔는 놀이개가 필요했고,
           일년에 한번이라지만 한달 간씩이나 걸리는 지방영주의
           에도성 문안 인사 행차는 객고를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중앙에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는 지방 영주는
           1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동경 입성하는 길목은 항상 북적 거리고 검문 검색이
           극심했다고 한다.
            
           바로 그 동경 입성하는 북쪽 길목이 요시와라 이고
           남쪽 길목이 가와사끼인 것이다.

           이제 전국이 통일되어 100여 년간의 전쟁은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집권을 도와 주었던 무사들왔
           논공행상을 해야 했다.

           그러나 땅덩어리는 한정되어 있다 보니, 전쟁에 나가
           팔 다리가 잘린 하급 무사왔는 베풀 땅이 없었다.

           사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결심한 것도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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